1. role of communication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존재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삶의 본질이다. 이러한 유지는 끊임없는 전수와 갱신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만큼 삶은 전수 및 자기 갱신의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회는 유지 및 영속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도 문명화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의식주의 제공이나 생식기능은 생물학적인 삶에 필수적인 만큼, 그러한 과정은 사회적인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일차적으로 의사소통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일한다고 해서 혹은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고용주와 직원 등 물리적으로 아무리 가까이 있는 사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모든 관계가 진정한 의미에서 의사소통을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의사소통이란 경험이 공동소유가 될 때까지 경험에 참여하는 과정으로, 그것에 참여하는 상호간의 성향에 수정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미성숙한 사회구성원들은 성인들의 관심사나 활동, 목적 등으로 입문함으로써 그러한 것들을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사회의 삶은 존속되어지며, 사회개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사회는 전수와 의사소통속에서 존재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은 의사소통을 통해서 그 지역사회의 목표나 신념, 포부, 정보 등과 같은 보편적 이해를 공유하거나 비슷한 마음을 가질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이해는 파이를 쪼개어 나누어 주거나 벽돌을 옮기듯이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보편적 목적을 인식하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러한 관점을 통해 자신의 특정한 행동을 조절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의사소통인 것이다. 즉, 우리는 의사소통을 통해서만이 타인이 무엇을 하려하고 자신의 목적이나 진전상을 타인에게 알릴수 있으  며, 목적의 공유나 관심의 교환, 의견의 일치라는 것도 바로 그것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 있어 의사소통이란 살아있는 사회생활과 동일시 할 수 있으며 사회가 틀에 부은 듯이 고정된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은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참여할 때 개조을 통한 사회의 영속이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에너지를 자신의 계속적인 활동을 위해 지배하고 통제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의 삶은 환경과의 반응을 통해 자기를 개조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인간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변화 및 발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교육'이라는 수단 때문이며, 이러한 교육은 일차적으로 의사소통을 통한 전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것에 의해 우리는 공동의 관심이나 보편적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2.  shared experience란?


진정한 사회생활은 바로 의사소통과 동일시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교육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모든 활동들을 사회적 관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타인의 정서적, 지적 성향이나 동의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여 각자가 바라는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경우 힘의 우월성이나 수완, 지위와 같은 솜씨의 우월성이 작용한 것이지 진정한 사회적 관계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그들의 활동이 아무리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고용주와 종업원, 통치자와 피통치자와의 관계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집단을 이루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명령을 주고받음으로써 행위와 그 결과에 변동을 가져오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목적의 공유나 관심의 교환을 가져오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의사를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의사를 전달받음으로써 자신의 경험이 확대되고 변화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어 가지며,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자신의 태도에 수정이 가해진다. 의사를 전달하는 사람 또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경험이든지 특히, 약간 복잡한 경험인 경우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해보면 그 경험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이런 효과가 없다면 우리가 한 일은 단순히 고함이나 절규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체계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험을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그 경험 바깥으로 비켜서서 다른 사람의 눈으로 그것을 보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떤 연관을 가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타인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형식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려면 그 사람의 경험의 한 부분을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동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의사를 전달받는다는 것은 곧 경험이 확대되고 변화된다는 의미로서, 서로간의 사고나 느낌을 공유하며, 이를 통해 각자의 태도에 수정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경험의 공유가 보다 잘 이루어 질 수 있기 위해서는 경험의 형식이나 순서를 체계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며, 따라서 사회조직이 틀에 부은 듯이 고정된 방식으로 운영될 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공유하는 사회조직에서 교육적 영향력이 행사될 수 있을 것이다.

 

3. formal education의 필요성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원시집단에서는 그들의 완전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정받는 성년식을 제외하고는 교수를 위한 특별한 장치나 제도같은 것은 없다. 대부분의 그들은 성인들의 행동을 모방하면서 비슷한 마음가짐이나 생각을 습득하고 그 집단의 풍습을 배운다. 이러한 그들의 비형식적인 교육은 그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에 보다 생동적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되고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그와같은 교육보다는 학교교육과 같은 형식교육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의 주된 임무라고 한다면, 아동들의 태도나 습관을 변화시켜 사회생활속에서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이전의 성인들의 행동모방을 통한 학습은 단순한 직업이나 활동을 제외하고는 점차 어렵게 되었으며 성인의 활동 대부분은 아동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것들이 되었다. 따라서, 성인들의 활동들을 아동들이 효과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어떤 훈련과정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즉, 학교라는 의도적인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교수의 임무가 학교라는 기관을 통한 인간사회 집단에 위임되게 된 것이다.
 즉, 학교교육은 아동들이 비공식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훈련을 받도록 내버려두어서는 가질수 없는 그와같은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으로 특히,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일수록 아동의 현재적 능력과 성인의 관심이나 활동사이의 갭(gap)이 커서 비형식적으로 사회의 성취된 것들이나 자원, 업적들을 전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에, 학교와 같은 형식적인 교육은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놀이를 통해 직,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활동의 참여는 적어도 개인에게 있어서 생동감이 있다. 원시사회에 존재하는 지식은 실제적이며 그것을 아동들의 인격속으로 스며들게하여 변화시킨다. 반면에 학교교육은 쉽게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실제감이 결여될 수 있으며 용어들이 추상적이거나 딱딱하다. 그러기에 학교교육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실제적인 경험과는 유리된 단순히 교과의 문제로 남게 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항구적인 사회적 관심사는 배제될 위험성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실제적인 사회생활의 구조속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학교교육은 문자로 표현된 전문적인 지식으로만 남아있는 것들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철학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교육의 여러형태 즉, 형식교육과 비형식교육, 의도적교육과 우연적 교육사이에 적절한 조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지식이나 전문적 기능의 습득이 사회적인 성향을 형성하는 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할 때 일상의 생생한 경험은 의미를 잃게 되고, 학교교육은 공부벌레나 이기적인 전문가만을 길러내게 되는 것이다. 즉, 학교교육은 비형식교육이 줄 수 있는 바로 실제성이나 생동감을 지닐 수 있도록 개발되고 이끌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서 '아동의 지적·도덕적 성장'이라는 학교의 본래적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1. 인간의 use of language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주지하시다시피, 우리는 언어의 사용을 통해 지식을 얻게 된다. 다시말하면, 지식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지금의 세대에서 다음의 세대로 언어의 사용을 통해 직접 전달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실이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타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전달하는 물리적인 과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식의 전달이나 개념의 이해를 위한 언어의 사용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언어의 사용을 통한 개념의 이해에는 어떠한 활동의 공유 즉, 공동활동의 원리가 결부되어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모자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모자를 머리에 쓴다든지, 바깥에 나갈 때에 다른 사람이 아이에게 씌워주는 등과 같이 실제로 그것을 사용해 봄으로써 개념의 이해가 가능하다. 비록, 'ㅁㅗㅈㅏ'라는 소리자체로는 단순히 반응을 일으키는 한가지 자극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무의미한 소리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활동과 관련을 맺을 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때, 'ㅁㅗㅈㅏ'라는 소리는 '모자'라는 물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활동을 나타내는 기호가 되는 것이며, 그 활동속에는 흥미나 관심 등과 같이 다른 요소들과 결부되어 '모자'라는 소리는 상호간에 동일한 혹은 비슷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언어는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소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러한 사실은 언어의 사용이 공동활동의 원리, 공동의 경험과 관련되었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ㅁㅗㅈㅏ'라는 소리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특정한 방식 즉, '어른이나 아이'양자간의 공동의 경험속에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슷한 개념이 생겨나는 것은 두사람이 하나의 활동속에 동업자로서 종사하고 있어서, 한사람의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하는 일에 의존하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말도 결국, 공동의 과제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물체나 소리가 서로에게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그 밖의 비슷한 소리들과 관련하여 사용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예를들어, '희랍철모'의 이해를 위해 사용된 여러 단어들은 그것을 듣거나 읽는 아동들에게 머리속으로 그 철모가 실제로 사용되는 활동을 재연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일으키게 한다. 이 경우에, '희랍철모'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 철모를 실제로 사용했던 사람들과 정신적인 동업자가 되는 것이다. 비록, 미대륙의 발견이나 희랍시대의 철모와 같은 지식은 직접 사용해 볼 기회가 전연 없지만 우리들의 상상을 통하여 공동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의 사용을 통해 지식을 전달하거나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사물은 공동의 경험이나 협동적인 활동에 사용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원리의 연장이요, 적용에 불과하다. 소리나 단어가 단순히 물리적인 자극으로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나 지적인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이 직접적이든 상상을 통해서든 공동의 상황속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2. Special environment의 의미는?

인간은 그가 관련을 맺고 있는 타인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들과의 관련속에서 사회적 환경은 무의식적으로 또한 특별한 목적을 떠나서 교육적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사회적 환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몇가지 방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사회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상생활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들의 언어습관이 형성된다. 물론 학교 기관과 같은 의도적인 교육을 통해 언어습관은 수정되고 변하기도 하지만, 극도로 흥분했을 경우에는 학습된 어법보다는 일상생활의 대화를 통해 형성된 언어습관이 나타나게 된다.
 둘째, 사회적 환경은 우리들의 생활태도나 예절에 대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흔히, 우리는 가르침보다 본보기가 강하다고 말하듯이, 생활태도는 지식의 전달로써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자극에 따른 습관적인 행동에 의해 습득되는 것이다. 아무리 이래라 저래라 하고 교정해 주어도 결국, 생활태도의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주위의 분위기나 정신이다.
 셋째, 고상한 취미나 심미적 감상력에 대한 사회적 환경의 영향력을 들 수 있다. 만약에 우리들의 눈이 언제나 우아한 형태나 색채로 된 조화로운 물체를 본다면 자연적으로 높은 수준의 취향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치장된 환경은 퇴폐적인 취향을 가져오게 하며, 마찬가지로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환경은 이에 대한 욕망을 고갈시킨다. 이러한 환경의 영향에 대한 의식적인 교육은 간접적인 전달만을 해 줄뿐 자발적이거나 개인의 성품 내면에 배여들게 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무의미한가에 대한 우리들의 가치판단 또한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기준에 따라 판단되어진다. 우리가 깊이 생각하거나 세밀히 조사하지도 않고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은 바로 우리들의 의식적인 사고 수준을 결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사고는 바로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주고 받음으로써 형성된 것들이다.


3. 3가지 special function이란 무엇이며, 그 의미는?


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교육한다. 즉, 미성숙자들의 행동과 사고, 감정이 일어나는 場인 환경을 통제하는 것이 바로 성인이 미성숙자들의 교육을 통제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학교는 사회 구성원의 지적, 도덕적 성향에 영향을 주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구성된 환경의 전형적인 예로서, 사회가 점점 복잡해져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글이나 문자를 통하여 전달하고자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교섭방식으로서의 학교는 삶의 일상적인 교섭과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다른 세가지 기능이 있다. 살펴보면,
 첫째, 학교란 단순화된 환경을 제공하는 사회적 기관으로서, 단순화된 환경이란 근본적이면서도 아동들의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환경을 말한다. 현재, 우리들의 사회 생활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관계는 그 수가 너무나 많고 복잡하며 서로 얽혀져 있어서 그 자체를 한꺼번에 전달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은 부분적으로 나누어지고 선택되어져야 하며 점진적인 순서에 따라 먼저 학습된 요소를 수단으로 하여 점차 복잡한 것에 대한 통찰을 얻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학교는 정화된 행동 환경을 확립함으로써 기존의 무가치한 특성들을 제거하여 그것이 정신적 습관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한다. 즉, 단순화 뿐만아니라 학교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솎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어느 사회에든지 그것에 방해가 되는 시시하고, 해롭고 낡아빠진 유물들이 있다. 학교는 환경으로부터 그러한 것들을 제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적인 사회환경에서 그런 것들이 주는 영향을 될 수 있는대로 소멸시키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학교는 기존의 결과물 전체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데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장차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을 보존하고 전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셋째, 학교는 사회 환경의 여러 요소들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각 개인으로 하여금 각자가 태어난 사회 집단의 제약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환경과의 접촉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집단의 다양성은 주로 지리상의 위치에 따른 것으로서 여러 사회가 있었지만 그 영토 안에서는 비교적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상업과 교통, 통신의 발달로 같은 국가 속에서도 전통적 풍습을 달리하는 다양한 집단의 복합체로 이루어져 있으며(특히, 미국과 같은 나라) 이러한 상황이 아동들에게 동질적이고 균형있는 환경을 제공할 학교라는 특별한 환경을 설립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인종과 종교, 관습이 다른 아동들이 뒤섞여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새롭고 보다 넓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 공통된 교과를 배움으로써 아동들은 작은 집단의 성원으로 고립되어 있을 때 보다도 더 넓은 다양한 세계에 대한 이해와 안목을 지닐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결국, 학교는 사회환경의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균형이나 조화, 통합, 조정의 임무를 통해 분열의 위험성을 막고, 보다 폭넓은 인식의 세계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1. 교육의 기준으로서 control과 guidence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연관하여 intentional direction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intentional direction은 무엇인가?


교육은 지도, 통제 안내라는 형식을 통하여 개인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거나 능동적인 경향이 산만하지 않도록 연속적인 진로를 따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활동 그 자체의 목적으로 안내하기 위한 지도는 불필요하고 산만한 동작을 제거하고 행위를 초점에 고정시키거나 하나하나의 행위가 연속적인 순서에 따라 질서있게 진행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사항들이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제방식을 통한 지도를 할 때에는 행위를 일으키는 자극을 결정해 줌으로써 사람들의 행위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명령이나 금지, 승인과 비난 등의 통제방식에서는 통제를 하는 사람이 행위에 직접 영향을 주려는 목적으로 자극을 발한다. 행위를 통제하려는 의도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바로 이 경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종류의 통제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고, 그것에 비하여 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통제방식을 오히려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통제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아이들이 참여하는 사태의 성격에서 나오는 통제이다. 사회 사태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방식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비추어 보면서 그것에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그들의 행위를 공동의 목적에 연결시켜 주며, 공동활동의 참여자에게 공통된 이해를 가져다 준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각각 다른 행위를 하더라고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것이다. 행위의 목적과 수단에 관한 이 공통된 이해가 사회통제의 요체이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가 아니라, 간접적인 통제이며, 지적 정서적 통제라고 보아도 좋다. 뿐만아니라, 그것은 외적인 강압에 의한 통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성향에 내재하는 통제이다. 관심과 이해의 동일성을 통하여 이러한 내적 통제를 이룩하는 것이 교육의 할 일이다.

 

2. initiation이란?


우리가 공동의 이해라든가 공동생활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물에 대하여 타인이 가지는 것과 동일한 관념이나 비슷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사회집단의 진정한 성원을 이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사회성원으로의 입문은 어떤 사물이나 행위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부여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입문을 통하여 공동의 활동에서 각자의 개인은 타인의 행위에 비추어 자신의 일을 돌아보며 또한 자신의 일에 비추어서 타인의 일을 보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개인의 활동은 동일한 전체 테두리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이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활동이 타인의 행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한 고려없이 분리되고 고립된 결과를 위한 행위일 경우에는 공동의 활동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 행위가 수렴되는 공동의 결과가 없으며, 진정한 의미의 교섭이라든가 집단의식이 배제되어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단지 몇가지 활동의 병치만 있을 뿐이며, 각자의 행위 그 자체만의 고립된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회성원으로 입문되기 위한 개인의 행위는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즉, 자신의 행위가 타인의 행위에 미치는 영향이나 타인의 행위가 자기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서 개개인의 활동이 이루어질 때 공동의 마음이나 의도같은 것이 작용하며, 그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해가 생기고, 이 공동의 이해가 각자의 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진정한 사회성원으로 입문되어진다.


3. disposition이란?


개인의 disposition(성향)의 형성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하려는 개인의 본능적 경향인 모방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다. 사회집단을 이루는 개인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동일한 신념이나 관념, 의도 등의 통제하에서 행동하게 되는데, 이러한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면 집단활동의 일원이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집단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의 압박이 계속된다. 결국, 모방의 효과라고 부르는 행동은 의식적인 교육의 결과요, 그 사람과 교섭하는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승인과 확인이 선별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의 결과이다.
 그러나, 목적의 모방은 목적을 달성하는데에 필요한 수단을 모방하는 경우와 구별되는 피상적이고 잠정적인 과정으로서 성향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러한 모방은 마치 원숭이나 앵무새의 흉내내기와 비슷한 것으로서 개인의 외부적인 행동에는 영향을 미치지만, 행동의 의미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반면, 아동들이 수단을 모방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관심이나 의도에 따라 자발적이고 효과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 타인이 행동하는대로 행동하는 것이 요구되며,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수단을 모방하는 것은 지적인 행동으로서 거기에는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고, 현재의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선택능력이 필요하다.
 결국, 진정한 사회통제는 모종의 정신적 성향의 형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다시말하면, 개인이 집단활동에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관련된 사물, 사건, 행위 등의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목적의 모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집단활동의 수단을 모방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1. Ed. as Formation이란?

Ed. as Formation(형성으로서의 교육)은 내부에서의 발현과정이나 마인드에 내재하고 있는 능력의 도야를 교육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제시되는 교과 내용에 의해 어떤 관계나 연관성을 제기함으로써 마인드를 형성하는 것을 교육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관점에서의 교육은 외부에서 진행되는 수업이라는 과정을 통해 마인드를 확장해가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역사적으로 볼 때, Herbart는 위와 같은 이론가의 대표자로서 그는 선천적 능력을 부정하였으며, 마인드는 단지 다양한 실재와의 반응속에서 다양한 특성을 산출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질적으로 다양한 반응을 PRESENTION(표상)이라 보았으며 일단 한번 나타난 모든 표상은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새로운 내용과 지성(soul)과의 반응을 통해 새롭고도 더욱더 강력한 표상이 생기게 되면, 이전의 표상은 의식의 문아래에 침전하지만, 그것 자체속에 내재한 운동성에 의해 그것의 활동력은 지속된다. 또한, 주의력, 사고력, 지각력 정서 등과 같은 falculty(능력 혹은 부소능력)은 의식의 아래에 스며든 이전의 표상들과 새로운 표상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 보았다.
그에 의하면, 마인드의 구체적인 성격은 상이한 질(quality)에 의해 형성된 다양한 표상들이 각각 다른 배열방식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마인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마인드이기에, 마인드를 전적으로 내용의 문제로서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3가지의 교육적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데,
첫째, 마인드의 형성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보다 적절한 교육내용을 제시할 수 있는가이며 둘째, 교육자의 임무는, 근원적 반응의 본질을 결정해주는 적절한 내용의 선택과 이전의 반응을 통해서 형성된 관념의 기초하에 후속하는 표상들을 배열하는 것이다. 셋째, 모든 교수방법에 있어서의 형식적 절차는 준비(새로운 표상을 동화하기 위해 구표상의 표출 및 활동) - 제시(산, 구표상과의 상호작용) - 적용(어떠한 과제수행을 위해 새롭게 형성된 내용의 적용)이라는 순서를 통해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의 교육적 기여는 틀에 박힌 반복이나 우연적인 범주에서 탈피한 의식적인 방법으로서의 '교수'의 의미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즉, 교육을 전통적인 우연적 영감에 의한 구성물이 아닌 명확한 목표나 절차에 의한 의식적인 활동으로 인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수나 도야(discipline)활동속의 내용물들은 궁극적인 이상이나 사색적인 정신적, 상징물들에 대한 막연하면서도 신화적인 것이 아닌 그에 의하여 보다 구체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천적 능력(ready-made falculty)을 부정하였으며, 인간의 falculties는 어떠한 교육자료나 내용의 제시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 보았다. 즉, 그는 어떤 다른 교육철학가보다 내용과 관련된 문제를 중요시 하였으며, 방법의 문제는 이러한 내용과의 관련성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듀이는 그의 견해에 대한 근본적인 결점으로서 사회적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방향을 재조정하거나 상호결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동적인 측면과 환경의 구체적 기능에 대한 간과를 지적하고 있다.
듀이에 의하면, 헤르바르트는 아동을 가르칠 교사의 의무는 강조하지만, 아동의 배울 특권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마인드에 대한 지적인 환경의 영향력을 강조하지만, 환경이 '아동의 보편적 경험의 공유'에 관계한다는 사실은 지나쳐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헤르바르트는 과거의 낡은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생기있는 무의식적인 태도의 역할의 중요성은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헤르바르트는 교육의 essence(정수)는 빼고 교육적인 모든 것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즉, 듀이는 모든 교육은 지적, 도덕적인 성격을 형성하지만, 그러한 것들의 형성은 결국, 사회 환경이라는 교과를 활용하기 위한 선천적인 활동들의 선택이나 조정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것들의 형성은 선천적 활동을 대상으로 할 뿐만아니라, 그러한 활동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리하면, 교육이라는 것은 바로 재구성 및 재조직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2. Ed. as Recaptulation & Retrospection이란?

생물학적, 문화적 측면에서 헤르바르트 및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제기된 Recaptulation(반복설)이라는 교육이론은 내부에 의한 발달과 외부로부터의 형성이라는 교육이론이 특이하게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단순한 태아조직에서 성체로의 성장은 동물의 진화단계를 되풀이하는 것이라 보았으며, 문화적으로도 인간은 한때 우리의 조상들이 영위했던 유목이나 수렵인의 본능이나 지적, 도덕적 야만상태에서 출발하여 목축생활에 상응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다시 다른 단계 등으로 나아가 드디어, 현대의 생활에 참여할 단계에 이르러 오늘날의 문화 생활 상태에 이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론에서의 교육은 주로 과거를 돌아보며, 과거의 문헌에 의존해야 하며 마인드는 과거의 정신적 유산에 따라 형성될 때 올바르게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듀이는 그와 같은 교육이론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물론, 인간의 태아는 하등동물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지만, 그 성장과정이 과거의 진화단계를 그대로 밟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반복의 법칙이 성립한다면 진화론적 발달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전 생활을 되풀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화나 발달이 일어난다는 것은 후세대가 이전세대의 성장과정을 지름길로 질러가서 그것에 변경을 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의 목적은 바로 그런 지름길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임무는 아동들을 과거의 반복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아동들의 사회적 환경은 문명인의 사고나 감정의 습관들의 작용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현재 환경의 영향력을 무시한다는 것은 교육의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물론 반복설은 유아의 삶 전체가 충동적이며, 맹목적이라는 점에서 또한 과거 역사의 산물이 이전의 경험에서 얻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미래의 경험에 큰 가치를 발휘할 것이라는 점에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현재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과 그것을 과거 지향적인 특성으로 인해 현 사회의 표준이나 모범으로 삼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듀이에 의하면,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반복설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유전'에 대한 오용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유전이라는 단어는 과거생활이 개인의 주요 특성들을 이미 결정하고 있으며, 그러한 특성들은 너무나 고정적이어서 개인에게 진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의미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전의 영향력은 환경과는 상반된 것으로 환경의 영향력은 과소평가되어지게 된다.
물론, 우리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활용할 수는 없지만, 반복설은 아동에게 이미 존재하는 능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교육의 예비단계로서, 개인의 타고난 적성과 결함을 세밀하게 조사함과 아울러서 나아가 이미 존재하는 활동이 잘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과 환경의 관계는 언어의 예를 통해서 잘 이해할 수 있다. 예를들어, 성대라는 천부적인 장치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대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환경에 의해 언어의 사용이 다소 결정된다는 것이다. 결국, 듀이는 과거의 유산(선천적 요소)을 현재의 요구나 기회와의 관련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듀이에 의하면, 과거의 유산을 공부하는 것이 현재를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현재가 과거의 산물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 산물을 만들어낸 삶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기 때문이며, 과거와 그 유산에 대한 지식은 그것이 현재에 들어올 때에만 의의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를 과거의 모조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문화유산을 이용하여 현재의 미숙한 부분을 다듬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움직이는 현재에 과거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과거가 현재의 움직임을 이끄는데 활용되는 경우이다. 과거는 상상의 큰 자원이요, 삶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지만, 이 모든 것은 과거가 현재와 절단된 또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현재의 과거로 생각될 때에 한해서이다. 현재에 일어나고있는 삶의 행위와 성장의 작용,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바로 현재에 나타나는 일인 것이다.

3. Ed. as Reconstruction이란?

 교육은 내부로부터의 잠재력의 계발이라는 주장과 그것이 과거의 물리적, 문화적 산물에 의해서든지 외부로부터의 형성이 교육이라는 관점과의 비교를 통해서, 듀이는 이상적인 성장을 가져다주는 교육은 바로 지속적인 경험의 재조직 혹은 재구성이라 한다.
경험의 재구성이란 경험의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며, 경험의 의미를 더한다는 것은 후속하는 경험의 방향을 결정할 능력을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참여하는 활동의 관련성, 지속성을 더 잘 지각한다는 의미이다. 활동은 처음에는 충동적인 형태로 즉, 맹목적이지만 그것에 교육적 의미가 수반될 때 이전의 지각할 수 없었던 관련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교육적인 경험의 다른 측면은 후속활동을 이끌거나 통제할 능력을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즉, 무슨일을 하고 있으며, 어떠한 결과를 의도할 수 있는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다 더 잘 예측할 수 있으며, 도움이 되는 결과를 얻도록 잘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내용이 전달되고 능력을 증대시키는 참된 교육적 경험은 틀에 박힌 행동이나 변덕스러운 활동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후자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결과를 관련시키지 않는다. 그와 같은 무목적적, 무계획적 활동은 주위환경에 대한 부적응으로 말미암아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지만, 학습은 오직 행동의 결과를 주목하게 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계속적인 재구성으로서의 교육은 목적(결과)과 과정을 동일한 것으로 보며, 그것은 곧 하나의 활동과정으로서 경험의 일정한 시간동안 진행되고 그 뒷부분이 앞부분을 완결한다는 뜻이다. 이 뒷부분은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관련을 드러내며, 그리하여 앞부분의 의미를 밝혀주며, 경험 전체는 이 의미를 가진 사물쪽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성을 확립시킨다. 이러한 경험의 계속적인 활동은 교육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은 바로 그러한 경험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경험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라는 것이기에 교육은 미성숙한 아동에게 그들이 속한 사회집단의 정신을 채워주는 일을 한다. 정적인 사회에서는 현재의 습관이 단순히 반복되도록 하지만, 진보적 사회에서는 더좋은 습관이 형성되도록 노력하며 앞으로의 사회가 이전의 사회보다 더좋은 사회가 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경험의 재조직 및 재구성으로서의 교육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1. Plato의 교육에 관한 견해를 Dewey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플라톤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천성적으로 욕망이 지배적으로 작용한다고 보았으며,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농산 계급에 배치되며, 개인이 교육을 받은 결과 욕망의 수준을 넘어 도량이 넓고 진취적이며 용기로써 자신을 드러내려는 성향을 가지게 되면 국가의 방위를 담당하는 군인 계급에 배속되며, 그 단계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것을 팡악하는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며, 국가의 입법가가 되어야 이상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는 국가를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 보았으며, 사회의 안정된 조직은 개인이 천성으로 타고난 적성에 따라 사회나 타인에게 유용한 일을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교육은 바로 그러한 개인의 적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사회에 유용하도록 점차 훈련시키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사회조직이 교육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젊은이들을 교육하는데에 사용되는 수단이 그 사회조직 여하를 결정한다는 점을 인정하였으며, 사람의 능력을 발견 및 발달시키는 교육의 기능을 깊이있게 통찰하였다.
그러나, Dewey는 개인에게는 저마다의 다양한 능동적 경향성이 있으며, 사회의 변화나 진보는 바로 다양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개인의 마음소겡는 오직 세가지 능력만을 인정하였기에 그와같은 교육은 각각의 계급에서 쉽사리 고정된 한계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또한, 플라톤은 그 의도에 있어서는 개인은 사회전체에 종속시켰다고 볼 수는 없으나 결과적으로, 개개인은 특이하며 타인과 대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사회가 변화속에서 안정을 이룰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과 계급이 제한되어 있다는 그의 주장은 결국, 개인을 사회에 종속시킨 것이 된다는 것이다.
Dewey는, 개인은 각자의 천성에 적합한 활동에 종사할 때 개인도 행복하고 사회도 원활하다는 플라톤의 확신, 개인이 갖추고 있는 능력을 발견하여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교육의 일차적 기능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의 타당성은 인정하지만, 지식의 진보나 사회가 민주화될수록 사회조직은 개인의 특수하고 다양한 자질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지언정, 계급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요컨대, 플라톤의 교육에 대한 견해는 혁명적이지만 고정된 이상에 묶여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변화는 무질서한 혼란의 증거이며, 진정한 실재는 불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현존하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면서도 일단 변화되고 난 뒤에는 변화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그런 국가를 건설하는데에 목적을 두었다. 결국, 그의 교육관의 결정적 오류는 교육의 점진적 개선으로 좀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또 그 사회가 다시 교육을 개선해 나가는 방법으로 교육과 사회가 끝없이 개선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 Moral의 영역은 교육과 어떻게 연관된다고 주장하는가?

도덕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식과 행동과의 관련된 문제이다.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의 학습이 개인의 인격함양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교육의 통합적·총괄적 목적이 도덕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식의 내용과 방법이 도덕적 성장과의 사이에 있어서 하등의 밀접한 유기적 관련이 없다면 행동의 원천이나 삶에 대한 태도에 통합되지 못하고 지식은 지식대로, 도덕은 도덕대로 구성된 체계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학습과 활동 또는 학습과 도덕을 분리시키는 두가지 이론인 내적성향(동기)과 신체적인 행위의 분리나 이해에 입각한 행동과 원리에 입각한 행동을 대립시키는 이론을 극복하는 길은, 학습이 사회적 목적을 가진 계속적인 활동 또는 작업의 부산물이 되도록 그리고 학습이 전형적인 사회적 사태에서 나온 자료를 활용하도록 교육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학교 그 자체가 사회생활의 한 형태요 지역사회의 축소판으로서, 학교 바깥에서 일어나는 공동생활의 경험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한다. 사회생활에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은 모두가 도덕교육이다. 그런 교육에서 형성되는 인격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구체적인 일을 하면서, 그와 동시에 성장에 필요불가결한 계속적인 재조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인격이다. 삶의 모든 장면에서 배우려고 하는 관심은 가장 중요한 도덕적 관심이다.

 

2. shared experience란?

Dewey는, 인간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무엇인가를 '공동'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의사소통의 과정은 바로 그러한 것들을 가지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요구되는 공동의 이해란, 그 집단이나 사회의 목적, 신념, 포부, 지식에 대한 이해를 유사하게 가지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그 사회의 기대와 요구 조건에 대해 사람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Dewey에 의하면, 의사소통의 과정이란, 서로서로의 생각이나 느낌을 가지며, 각자의 태도에 수정이 가해지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개인의 경험이 확대되고 변화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체계화하여야 하며, 그것을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그 경험바깥으로 비켜서서 타인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떤 연관을 가질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그 사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형식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경험을 타인이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그것을 동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생활은 의사소통과 동일시 할 수 있으며, 교육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활동이 사회적 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를테면, 타인의 정서적, 지적 성향이나 동의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여 각자가 바라는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경우, 힘의 우월성이나 수완, 지위와 같은 솜씨의 우월성이 작용한 것이지 진정한 사회적 관계라고 볼수는 없다는 것이다.
설사, 그들의 활동이 아무리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고용주와 종업원, 통치자와 피통치자와의 관계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집단을 이루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명령을 주고 받음으로써 행위와 그 결과에 변동을 가져오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목적의 공유나 관심의 교환을 가져오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경험의 공유가 보다 잘 이루어 질 수 있기 위해서는 경험의 형식이나 순서를 체계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며, 따라서 사회조직이 틀에 부은 듯이 고정된 방식으로 운영될 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공유하는 사회조직에서 교육적 영향력이 행사될 수 있을 것이다.

 

2. special environment의 의미는?

환경은 생명체의 특징적인 활동을 조장하거나 저해하는 또는 자극하거나 금지하는 조건을 말한다. 특히, 타인과 함께 활동하는 존재는 사회적 환경을 가진다. 즉, 개인의 활동은 타인의 기대나 요구, 승인이나 비난 등의 영향을 받으며, 타인의 활동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활동경향을 구성하는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환경은 외부적인 행동습관을 형성한다. 인간이 동물들을 통제하는 것은 자연적인 자극의 통제 즉, 특정한 환경의 조성으로 가능하며 인간의 행동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수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행동의 지적, 정서적 성향의 변화가 아닌 외부적인 행동의 변화이며, 미성숙한 인간의 활동에 있어서는 오직 유용한 습관을 가지도록 하는 목적으로 조종된다.(쥐의 미로 실험이나 말을 다루는 경우의 예)
하지만, 미성숙한 인간이 공동의 활동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경우에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행동과 일치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는 동안에 타인을 움직이는 것과 동일한 생각이나 정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호전적인 부족의 예)
이러한 사회라는 특별한 환경은 어떤 욕망이나 생각을 직접 심어주는 것도 아니요, 본능적으로 눈을 깜박이거나 주먹을 피하는 것과 같이 순전히 신체적인 행동습관을 형성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방식을 자극하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또한, 사회적 환경은 개인을 단체 활동의 참여자로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단체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단체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느끼도록 하며, 그의 신념이나 관념이 그 사회집단의 타인들의 그것과 비슷한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습관적인 행위의 한 구성요소인 그들과 동일한 지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활동경향을 구성하는 환경 특히, 타인과 함께 공유하는 삶을 이루는 인간에게 있어서 사회라는 특별한 환경은 그 집단이 요구하는 동일한 관심을 가짐으로써 훈련이나 반복적인 행동 습관의 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방식을 자극하는 조선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1. 교육의 기준으로서 control과 guidence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연관하여 intentional direction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intentional direction은 무엇인가?

'direction'(지도)은 교육받는 사람의 능동적인 경향이 아무 목적없이 산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진로를 따라 이끌어진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이 어떻게 발휘되어지는가에 따라 안내와 조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규제와 지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지도나 통제가 활동을 활동 그자체의 목적으로 안내하기 위해서는, '지도'라는 행위를 초점에 고정시킴으로써 그 행위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반응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하고 산만한 동작을 제거해야 한다. 또한, 각각의 행위는 그 즉각적인 자극에 대처해야 할 뿐만아니라, 그 다음의 행위를 하는데에도 도움이 되도록 계열성이나 연속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도는 한 특정한 시점에서 문제의 초점에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있는 것만을 선택한다는 의미도 지니며, 연속적인 계열에서 어떤 행위가 전후의 행위와 균형을 이루어서 활동이 순서를 갖추게 된다는 의미도 지닌다.
따라서, 완전한 외적인 지도는 있을 수 없으며 환경은 반응을 유발하는 자극을 주는 역할만을 할 뿐이다. 결국, 모든 지도는 이미 지니고 있는 본능이나 습관의 영향속에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단지 재지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외부적인 풍속이나 규정에 의한 통제는 즉각적인 효과는 낼 수 있어도 개인의 이후 행동이 균형을 이룰수 없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아동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지도를 받은 후의 전개과정을 성실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제나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아이들이 참여하는 사태의 성격에서 나오는 통제이다. 사회 사태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방식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비추어 보면서 그것에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그들의 행위를 공동의 목적에 연결시켜 주며, 공동활동의 참여자에게 공통된 이해를 가져다  준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각각 다른 행위를 하더라도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것이다. 행위의 목적과 수단에 관한 이 공통된 이해가 사회통제의 요체이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가 아니라, 간접적인 통제이며, 지적·정서적 통제라고 보아도 좋다. 뿐만아니라, 그것은 강압에 의한 통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성향에 내재하는 통제이다. 관심과 이해의 동일성을 통하여 이러한 내적 통제를 이룩하는 것이 교육의 할 일이다.


1. 교육은 candidate of social membership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고 한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듀이는, 지금가지 실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장래를 위한 준비'로서의 교육의 개념을 부정하고, 교육은 지속적인 성장의 과정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혹, 교육은 미래에 대한 준비를 현재의 노력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을 가능한 풍부하고 의미있게 구성하는데에 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때, 자연스럽게 현재는 미래속으로 융합되어 미래의 요구에 대해 잘 대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준비로서의 교육'은 어떠한 폐단을 야기시킬 수 있는지 듀이의 견해를 살펴보자.
듀이는 첫째, '준비로서의 교육'은 동기가 활용되지 않음으로써 추진력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흔히, 아동은 현재에 살고 있으며, '미래로서의 미래'라는 것은 어떤 긴박성이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왜 그와 같은 준비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인식없는 준비는 준비의 사닥다리를 팽개쳐버리는 것이요, 너무나 막연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둘째, 실제 준비해야 할 미래는 현재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그것이 현실화되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현재는 아동들에게 너무나 놀랄만한 기회나 호기심을 제시하고 있기에 그들의 관심이나 정력은 온통 현재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교육은 현재의 조건을 교육의 목적에 맞도록 경주하는 교육관에 비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셋째, 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능력은 보통 평균적으로 개대되고 요구되는 표준에 맞추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장, 단점을 엄밀하고 정확하게 판단하여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일반적으로 무엇을 하게 되어있는가에 대한 막연하고 불확실한 의견에 따라 교육을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준비라는 교육원리는 쾌락이나 고통이라는 외적 동기에 대대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가능성과 단절된 미래는 교육을 자극하거나 이끌어 낼 수 없기에 잘하면 상을 준다는 약속이나 잘못하면 벌을 가한다는 위협 등의 방법에 주로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한 요소로서 현재의 요구에 따라 행해지는 바람직한 활동은 그와 같은 외적동기에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반응을 유발하는 자극 또한 아동이 실제로 직면하게 되는 상황속에 거주하는 것이다.
결국, 미래에 대한 준비를 위하여 현재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교육체제는 달콤한 미래라는 유혹을 통하여 아동들이 원하지 않는 것으로 향하게 할 수 있으며 반대극단이라는 부정적인 행동이나 결과를 야기시킬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반면, 성장으로서의 교육은 당연히 현재의 가능성을 점차적으로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이후의 문제해결에 더 적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성장이라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미래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만약, 학교안이건 밖이건 간에, 환경이 현재의 미성숙한 인간의 역량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조건을 제공한다면, 현재의 연장인 미래는 저절로 해결되는 셈이다.
결국, 준비로서의 교육의 오류는 '미래를 위한 준비'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노력의 주된 원천을 미래에 두는 것이다. 끊임이 발달하는 삶을 위하여 준비를 갖출 필요가 크면 클수록 현재의 경험을 될 수 있는대로 풍부하고 의의있게 하도록 노력을 경주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 할 때, 어느 틈엔가 미래로 연결되며 그에 따라 미래의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