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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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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같은 모국어에 실린 민족현실
"차디찬 아침인데 /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저고리를 입고 /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계집아이는 자성으로 간다고 하는데 /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밖에 / 내지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밈을낸다 / 계집아이는 몇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 이렇게 추운 아침인데도 손이 꽁꽁 얼어서 /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팔원>전문) 1930 년 대는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더욱 강화한 엄혹한 시기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문학이 두드러진 활기를 띠고 활짝 꽃핀 시기이기도 하다. 연세대 이선영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30년 대에 생산된 작품의 양은 20년 대의 세배를 훨씬 웃돌고 40년 대의 두배가 넘으며 심지어 50 년 대보다도 더 많다. 시의 경우만 보아도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김영랑 박용철 오장환 이육사 유치환 이용악 서정주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설정식 임화 윤동주 김상용 등 빛나는 별들이 이리저리 무리지어, 모더니즘 계열, 순수서정 계열, 민족의식 계열 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구인회, 시문학파, 카프 등등의 이름으로 성좌를 이루며 30년 대 문학의 천체도를 수놓고 있다. 그 별들 가운데 하나가 백석이다. 30년 대의 어둠을 밝힌 일등성이 틀림없는, 그리고 특히 '민족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면 그 밝기가 더욱 도드라질 이 별은 그러나 오랫동안 남북한 문학의 천체도에서 누락돼 있었다. 남한의 문학사에서 그가 누락된 것은, 임화나 이용악의 경우가 그들의 정치적 입장과 실천이 직접적 이유가 된 것과는 달리, 해방과 분단의 시기에 그가 우연히 자신의 고향인 북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모국어를 수호, 보전하고 그 모국어 속에 민족적 삶의 실감을 담아 내는 것이 식민지의 시인에게 맡겨진 최대의 소명이라고 한다면 백석은 자신의 소명을 누구 못지않게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수원 백씨 백용삼으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석(白石,白奭)은 필명이고 본명은 기행이다. 그의 부친은 우리나라 사진사의 초창기 인물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으로 일했고, 퇴임 뒤에는 낙향해 정주에서 하숙을 쳤다. 분단 이전에 경의선을 타면 서울에서부터 서른 네 번째 역인 정주는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번성하던 지역이지만, 백석의 집안은 기독교와는 무관한 분위기였다. 시인이 어린시절을 보낸 이곳 주위의 풍경은 "산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성터 /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 ..."로 시작되는 '정주성'을 비롯해 첫 시집 <사슴> 속의 많은 시에 녹아들어가 있다. 백석은 이곳에서 오산소학교와 오산학교를 다녔다. 이 시절 그는 처음으로 서울을 다녀왔는데 뒷날 이때의 서울 인상을 "건건쩝쩔한 내음새나고 저녁때 같은 서글픈 거리" 라고 저고 있다. 18살 때인 1929년 오산고보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를 졸업한 백석은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유학해 아오야마 학원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 한다. 백석은 대학시절인 1930년 1월 한 여성의 기구한 삶을 그린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온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확인된 백석의 유일한 소설이다. 1934년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출판부기자로 입사해 당시 이 신문사가 내던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리고 이듬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해 시단에 얼굴을 내민다. 이 시를 발표하기 전부터 백석은 정주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추억을 담은 시를 여럿 쓰고 있었고, 그 덕분에 시단 데뷔 이듬해인 1936년 1월 35편의 시가 <사슴>이란 표제로 묶여 나올 수 있었다. 1월 29일 서울 태서관에서 열린 이 시집 출판기념회의 발기인은 안석영 함대훈 홍기운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 등 11인으로 돼 있어 당시 백석의 교우관계를 짐작하게 해준다. 한국 만화 , 영화계의 선구자인 안석영을 포함해 소설가 허준 함대훈 그리고 김기림 등 발기인의 많은 수가 조선일보사의 동료들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에 있던 시인 김기림은 이 신문의 신간소개란에 쓴 '<사슴>을 안고'라는 글에서 "<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추미에도 불구하고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김기림은 <사슴>의 시들이 보여주는 감정의 지적 통제에서 모더니즘의 영향을 읽어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백석이 시각적 이미지 묘사를 중시한 이미지즘 계열의 모더니스트적 면모를 다소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뒷날의 시편들과 함께 <사슴>을 더욱 또렷이 특징지우는 것은 북방정서, 강한 방언주의 그리고 민족주체의 민중정서 같은 것들이다. 그가 이용악 등과 함께 나누고 있는 북방정서도 우리 시의 주류에서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눈여겨볼 만하지만, 지난 87년 <백석시전집>을 엮어낸 시인 이동순씨(영남대교수)는 특히 그의 방언주의에 주목한다. 전집 뒤에 낱말풀이를 붙여야 했을 정도로 심했던 백석의 방언주의는 이씨에 따르면 민족언어의 뿌리조차 말살하고자 획책했던 일제의 파쇼적 불법성 앞에서 그를 지탱해준 목구어 정신의 표상이다. 그리고 그 방언주의는 민족 주체성의 확보와 모든 동족 사물들 사이의 관계의 합일에 목표를 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타는 모닥불 / / ... "로 시작되는 시 '모닥불'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개체, 개인을 '모닥불'이라는 합일의례의 공간 속에서 융화시키며 시인의 평등사상,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여승'의 ".../ /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덩판 /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섶벌 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 갔다 /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 ..." 같은 구절들은 지아비와 딸을 잃은 여성의 삶을 통해 식민지의 한 가정이 파괴되는 과정을 압축함으로써 뒷날 '팔원' 같은 시에서 더 심화될 민족현실의 탁월한 시적 형상화를 예고하고 있다. 백석은 <사슴>을 낸 해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전직한다. 그의 전직은 그보다 1년 앞서 영생학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평론가 백철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동문학가 강소천씨와 목사 김관석씨가 이 시절 백석에게 배웠다. 이들과 함께 백석의 제자였던 충북 청주시의 개업의 김희모(70)씨는 이동순씨가 정리해 월간 <현대시> 90년 5월호에 기고한 '내 고보시절의 은사 백석선생'에서 이 시절의 백석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김씨에 따르면 백석은 뛰어난 기억력과 훌륭한 영어발음을 갖춘 '모던보이' 였고, 수업시간에 러시아 작가들에 관해 주로 얘기했으며, 축구부의 지도교사였다. 백석은 교직 생활 2년 만인 38년 이 학교를 사직하고 다시 서울로 와 <여성>의 편집을 보다가 이듬해에 만주의 장춘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백석의 생애는 그의 문학사적 중요도에 견주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영생고보의 취직부터 만주로 건너갈 때까지 3년 동안의 행적은 이 시기에 그와 동거했던 '자야 여사'의 회고에 의해 그 편린이 밝혀지고 있다. 성이 김씨인 자야 여사는 현재 76살로 미국에 살고 있는데, 그가 서울에 살던 3년 전 이동순씨를 만나 행한 백석에 관한 회고가 <창작과 비평> 복간호 (1988년 봄)에 실려 있다. 그가 백석을 만난 것은 36년 가을 함흥에서였고 '자야'는 백석이 그에게 지어준 호라고 한다. 자야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37년과 39년 부모의 강권으로 두 차례에 걸쳐 고향에서 혼례를 치렀다. 그러나 그 때마다 며칠을 못 채우고 다시 자야 여사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당시 백석과 가까웠던 사람들로는 시집 < 사슴 >의 발기인들외에 함께 유학을 했던 정근양, 동향선배 백철, 서양화가 정현웅 등이 있었다. 정현웅은 31년 선전에서 작품 '여인상'으로 특선한, 백석의 <여성> 동료이다. 영생학원을 그만둔 백석이 서울로 돌아와 자야 여사와 살림을 차린 곳은 청진동이었는데 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이 바로 이 청진동 집이라고 한다. 자야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일본작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이야기를 자주 했으나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은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또 육류를 싫어하고 나물반찬을 좋아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에는 동치미국, 댕추가루, 명태창난젓, 맨모밀국수 등 음식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경상대 유재천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백석의 ㅣ에 등장하는 음식물 명칭은 1백여가지에 이른다. 유 교수는 백석의 시에서 음식물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만주로 건너간 백석은 그곳에서 생계유지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생활, 세관업무 등에 종사하며 해방이 될 때까지 머문다. 이 시절 만주의 하얼빈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김희모씨가 백석이 일하던 안동의 세관에 들러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백석은 지난날의 멋스러움과 생기발랄함이 사라진 초라한 중년사내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백석은 40년 10월에는 자신이 번역한 토머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의 출간을 앞두고 교정을 보기 위해 잠시 서울에 다녀가기도 했다. 백석의 대부분의 시가 만주 이주 이전에 쓰이기는 했으나, 만주시절에도 그는 10여편의 시를 국내의 잡지에 발표했다. 대개 40년초부터 41년 4월까지 1년 남짓 사이에 쓴 그 시들은, 연구자들에 따르면, 역사에 대한 가책과 회의 그리고 고향 상실감과 운명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로 시작해서 시들어가는 민족사를 부끄러움에 담아 슬프게 노래한 '북방에서'나 이역생활의 쓸쓸함과 망향의 그리움이 짙게 배어있는 '흰 바람벽이 있어', 두보나 이백같이' 같은 시들이 그 예이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조국으로 돌아와 한때 신의주에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분단과 함께 그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이 남쪽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6ㆍ25때 북진한 국군에 의해 한때 정주군수로 임명되었다가 그 때문에 그 뒤에 숙청되어 늙마를 불우하게 보냈다고 한다. 반면에 전쟁 뒤에도 그가 김일성대학에서 얼마동안 강의를 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문학>에 의하면 62년까지 그가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단고 밝힌 이동순씨는 그러나 백석의 방언주의와 북한의 문화어정책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었을 터이므로 그의 문학활동이 활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모국어의 지역성과 향토성을 짙게 풍기는 어법에 주목한 30면대의 시인 박용철에 의해 "전반적으로 침식받고 있는 조선어에 대한 혼혈작용 앞에서 민족의 순수를 지키려는 으식적 반발의 표시"로 해석된 백석의 시는 이렇게 남북 양쪽으로부터 홀대받았다. 그러나 백석 시의 영향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는 이동순씨는 백석의 시가 민족주체성이 망가진 시대에서 고향의식과 그 끈질긴 생명력을 팽팽히 응집합으로써 꺼져가는 이 나라 모국어시의 명맥을 되살려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백석의 모더니즘 세례를 주목하는 시인 최두석씨(강릉대 교수)도 백석은 외래적인 모더니즘의 단순한 수용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장 주체적인 입장에서 소화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보였다는 점에서 김광균이나 김기림 같은 군소시인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고종석 (199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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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중에 확인된 소설이 < 그 모와 아들 > 한편이라 하였는데 그밖에 <마을의 유화> - 1935, <닭을 채인 이야기> - 1935 등이 알려져 있고 자야 여사의 경우 작년 (1999)에 타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