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속에
귀머거리 너구리가
살고 있었네.
어느 날 밤
마을 가까운
강냉이밭에
곰도, 멧돼지도,
귀머거리 너구리도,
다 함께 내려와
강냉이를 따 먹었네.
그러자 밭임자 영감
두―두― 소리쳤네.
그 소리 듣고
멧돼지가 먼저 달아났네,
그 뒤로 곰이 달아났네,
그러나 귀머거리 너구리
그 소리 들리지 않아
꿈쩍도 아니 하고
뚝하고 한 이삭
뚝하고 두 이삭
강냉이만 따 먹었네,
그러면서 하는 말
(달아나긴 왜들 달아나?)
멧돼지와 곰은
달아나며 생각했네―
너구리는 저희들보다
겁 없고 용감하다고
이리하여
귀밝은 도적놈들
귀먹은 도적놈을
우러러보았네.
어느 날 밤
마을 가까운
모밀밭에
오소리도 노루도
귀머거리 너구리도
다 함께 내려와
모밀을 훑어 먹었네.
그러자 밭임자네 개들이
컹―컹― 짖어댔네.
그 소리 듣고
오소리가 먼저 달아났네,
그 뒤로 노루가 달아났네,
그러나 귀머거리 너구리
그 소리 들리지 않아
꿈쩍도 아니 하고
쩝쩝하고 한 입
쩝쩝하고 두 입
모밀만 훑어 먹었네,
그러면서 하는 말
(달아나긴 왜들 달아나?)
오소리와 노루는
달아나며 생각했네―
너구리는 저희들보다
겁 없고 용감하다고.
이리하여
귀밝은 도적놈들
귀먹은 도적놈을
우러러보았네.
어느 날 밤
마을 끝에 놓인
그 뉘집 닭의 홰에
여우도 삵이도
귀머거리 너구리도
다 함께 내려와
닭을 채려 하였네.
그러자 안방 마나님
탕! 하고 방문 열었네.
그 소리 듣고
여우가 먼저 달아났네,
그 뒤로 삵이가 달아났네,
그러나 귀머거리 너구리
그 소리 들리지 않아
꿈쩍도 아니 하고
이리 쿡쿡
저리 쿡쿡
닭 냄새만 맡았네.
그러면서 하는 말
(달아나긴 왜들 달아나?)
여우와 삵이는
달아나며 생각했네―
너구리는 저희들보다
겁 없고 용감하다고.
이리하여
귀밝은 도적놈들
귀먹은 도적놈을
우러러 보았네.
이리하여
귀먹은 도적놈은
귀밝은 도적놈들 속에서
겁 없고 용감한
첫째가는 도적놈 되었네.
그런데 한 번은
산 우에 사는 짐승 ― 도적들
산 아래 마을 사람네
낟알을 배앗으려
개 도야지를 잡아 먹으려
마을로 쳐내려와
산짐승들과 마을 사람들
서로 어울려 싸우게 됐네.
이때 산짐승들
하나 같이 말하였네―
겁 없고 용감한 너구리
대장으로 삼자고.
그리하여
귀머거리 너구리는
곰, 여우,
멧돼지, 오소리,
삵이, 노루……
뭇짐승들의 대장되어
장하게도 앞장서서
싸우러 나갔네.
그런데 정말로는
겁 많은 너구리,
귀를 먹은 탓에
무서운 소리 못 듣고,
소리를 못 들은 탓에
용감하게 보이던 너구리,
바로 그 눈앞에
몽둥이 든 사람들
개들을 앞세우고
오는 것 보자.
그만이야 맨 먼저
질겁을 하며
네 발이 떠서 도망쳤네.
귀머거리 겁쟁인 줄
꿈에도 모르고
너구리를 대장 삼고
싸우러 나왔던
산짐승들 이때에야
깨닫고 한했네―
(귀머거리 겁쟁이
너구리를 대장 삼은
우리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귀먹은 도적놈을
어리석게 대장 삼고
싸우러 나왔던
귀밝은 도적놈들
이리하여 싸움에서
지고 말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