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이 북만주의 신경으로 떠난 것은 그의 나이 28세 때인 1939년 말이었다. 그는 직장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문우들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만주땅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도 그의 이 같은 떠남이 무슨 이유에 의한 것이었는지 못내 석연치 않다. 김자야가 말하듯이 복잡한 가정사와 봉건적인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북만주행을 결심할 수도 있으나 이것만으로 직장과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설득력이 좀 약하다.

 어쨌든 백석은 서울을 떠났다. 그럼으로써 그는 1930년대를 떠돌이로 보낸 셈이다. 요컨대 그가 태어났고 오산학교를 다녔던 정주로부터 떠나와 그는 일본의 동경으로, 조선의 서울로, 함흥으로, 다시 서울로, 그리고는 마침내 중국의 만주 지방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20대의 젊은 시기를 보냈던 것이다. 그 동안 백석에게는 뚜렷하게 항일운동을 하였다든지, 그룹을 만들어 문학활동을 하였다든지, 일제나 관으로부터 직접적인 가해를 받았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는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그 시대적 압력을 벗어날 수 없었고, 봉건유습이 남아 있는 당대의 현실 속에서 갈등과 번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문학적 재능을 타고 난 사람으로서 문학적 형식으로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경 유학까지 한 젊은이로서 교육과 문화활동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20대의 청춘으로서 여인과의 사랑문제로 마음을 썩이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따라서 굵직한 어떤 일이 그에게 나타났던 것은 아니지만, 백석의 20대와 그의 문학작품 속에는 1930년대를 이땅에서 살아낸 지식인의 전형적인 한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요컨대 일본에의 유학, 기독교 문화와 서구문학과의 만남, 봉건유습과의 충돌, 신문사나 잡지사에 근무, 신식 교육을 하는 주체, 일본제국주의와의 갈등, 신문학과 신문화의 창출자, 만주나 간도로의 유랑 등의 면모를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 당대의 백석과 같은 지식인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내용들이다.

 백석은 만주의 신경으로 떠난 이후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발행된 당시의 문학지《문장》이나《인문평론》등에 「北方에서」,「힌 바람벽이 있어」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조광》지나《야담》지 같은 데는 러시아 작가의 소설을 번역하여 수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1940년에 조광사에서 토마스 하디의 소설『테스』를 번역, 출간하는 등 거처만 서울에서 만주로 바꾸었을 뿐 국내문단과 관계를 갖고 여전히 작품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백석 작품에는 북방의 서늘한 분위기와 뿌리를 잃은 당대 지식인의 우울한 내면세계가 담겨 있으며 백석의 작품 중 절창이라고 불리우는 몇몇 작품이 들어있다. 이 점은 백석이 이곳에서 어느 때보다도 내외적으로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백석은 만주로 간 후, 신경시 東三馬路 시영주택 '황씨집'에 살았다. 송지영이 김자야에게 전한 내용에 의하면 그는 이곳에서 무슨 관청인가를 다녔는데 창씨개명을 하라는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그 직장을 나왔다고 한다. 이 점은 1940년에 들어와 일제가 창씨개명을 시작하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키는 등, 조선인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다다르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되는 부분이다(이때 백석은 송지영과 같은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백석은 그 관청을 나와 많은 고생을 하였을 것이라고 하는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서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생활 등을 하다가 안동의 세관에 근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매우 궁금한 점이 있다. 그것은 영문학을 전공한 백석이 어떻게 측량보조원이나 측량서기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그가 측량관계의 일을 한 것은 물론 남의 밭을 얻어 소작인 생활을 한 것이 나타나 있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은 그가 1941년도 4월, 《조광》지를 통하여 발표한 시작품 「귀농」이다. 이 작품 가운데서 필요한 부분을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백구둔(白狗屯)의 눈녹이는 밭가운데 땅풀리는 밭가운데
촌부자 노왕(老王)하고 같이 서서
밭최뚝에 즘부러진 땅벋들의 버들개지 피여나는데서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나는 땅님자 노왕한테 석상디기 밭을 얻는다

노왕은 집에 말과 나귀며 오리에 닭도 우울거리고
고방엔 그득히 감자에 콩곡석도 들여 쌓이고
노왕은 채매도 힘이들고 하루종일 백령조 소리나 들으려고
밭을 오늘 나한테 주는것이고
나는 이젠 귀치않은 測量도 文書도 실증이 나고
낮에는 마음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싶어서
아전노릇을 그만두고 밭을 노왕한테 얻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불 때 백석이 측량사 노릇과 관청 일을 하였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일에 매력을 못 느껴서 마침내 그것을 그만두고 부자인 노왕으로부터 밭을 얻어 농사일을 하며 쓸쓸하지만 자족하듯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처럼 백석은 만주에서 자신의 전공이나 취향과는 무관하게,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며 외로움과 적막함속에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또한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 볼 때, 그 당시 백석이 이런 생활을 하며 식민 시대의 지식인으로, 조국과 고향을 떠난 유랑객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봉건 유습의 피해자로, 적성에 맞지 않는 생활인으로, 그야말로 쓸쓸하고 외롭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특히 그의 작품 「힌 바람벽이 있어」「북방에서」「조당에서」「杜甫나李白같이」등에 이런 사실이 잘 표출돼 있다. 이런 사실은, 백석의 영생고보 제자로서 지금은 의사인 김희모가 스승인 백석을 찾아 뵙고 그가 얼마나 초라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는가를 전해준 자료에서도 잘 드러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신의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보면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이 그가 신의주로 거처를 옮기고 유동에 있는 박시봉 씨 집 방에 살면서 쓴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백석의 친구인 허준이 해방 이전부터 가지고 있다가 백석이 북쪽에 있는 동안 허준에 의하여 1948년 《學風》지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점은 작품의 내용과 백석이 신의주에 간 시기를 생각할 때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이다. 왜냐하면 분명 이 작품은 백석이 신의주에 있는 유동의 박시봉 씨 방에 살면서 창작한 것으로 그 내용이 되어 있는데, 백석이 만주에서 신의주로 간 것은 해방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백석의 시를 해방기 동안 남한 문단에 발표해준 허준과 백석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허준은 백석과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다. 소설 「殘燈」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허준은 1910년 생으로 백석보다 두 살이 많다. 그는 백석이 만주로 떠난 후 역시 백석의 친한 친구였던 수필가이자 의사인 정근양과 함께 백석의 뒤를 따라 만주로 갔을 만큼 백석과 가까웠으며 방금 말한 바 처럼 백석의 작품을 갖고 있다가 해방기의 남한 문단에 발표해주었을 만큼 백석을 아꼈다. 그러나 이런 허준도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였다가 6·25이전에 월북을 하게 되거니와 그로 인하여 허준의 존재도 우리 문단에서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상태이다.

 백석은 신의주에서 잠시 머물다가 이내 고향인 정주로 갔다. 일본으로, 중국으로, 만주로, 시베리아로, 하와이로 떠났던 사람들이 해방을 맞이하여 이른바 귀소본능을 어쩌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것처럼 백석도 해방이 되자 그가 태어나서 자랐던 평안북도의 정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그가 정주에 돌아간 것이 해방 후의 일이고, 거의 해방기 동안 남한문단과의 교류가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상에 따라 월북 혹은 월남할 수 있는 것이 당시의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주에 남아 있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백석이 북한에 그대로 머문 것은 얼마간 그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그가 분명하게 선택하였다기보다 어쩌다 보니 그곳에 머물게 됐을 수도 있으나, 적어도 조선일보사의 기자 노릇을 하였다든지, 함흥영생고보의 교사노릇을 하였다든지, 만주에서의 생활을 하였다든지 하는 점 등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가 시대의 문제를 판단할 만한 고급 지식인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의 북한 잔류 행위가 보다 선택적이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그렇다고 해도 또한 석연치 않은 점은 있다. 그것은 해방 이전까지 백석이 보여준 일반적인 행동이나 그의 작품 활동을 보면 어느 구석에서도 카프의 구성원들을 비롯한 좌익문인들이 드러냈던 행동이나 문학적 특성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토속적인 소재로, 모더니즘적인 방법론을 동원하여, 어느 단체에도 끼지 않은 채 탈정치적이며 탈이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찌보면 백석과 친했던 허준이 월북을 했고, 역시 백석과 가까웠던 연극인이고 동시에 문인으로 활동했던 안석영이 카프의 일원이었으며, 대체로 당대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좌익 쪽에 기울어져 있던 해방기의 문단상황이 그로 하여금 북한에 거주하게 만든 하나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짐작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짐작이다.
어쨋든 백석은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그런데 혹자는 백석이 만주로부터 고향인 정주로 돌아가 한때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 점은 크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물론 백석이 오산학교를 다닐 시절 그 당시의 오산학교 교장이 고당 조만식이었고 또한 고당이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한 일까지 있는 것을 상기한다면 고당과 백석사의 친밀한 관계를 상정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1961년도까지 백석이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조선문학》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볼 때 백석이 고당의 비서 노릇을 하였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고당 조만식은 북한에서 일찍이 김일성에 의하여 숙청을 당하였는데 만약 백석이 고당의 비서 노릇을 하였다면 그가 1950년대에는 물론 1961년 까지 공산당 산하에 있는 조선작가동맹의 맹원이 되어 그 기관지인 《조선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활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백석이 6·25때 북진한 국군에 의하여 한때 정주 군수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는 이야기도 설득력이 거의 없다. 이 점 역시 만약 백석이 남한군에 의하여 점령된 정주땅에서 정주 군수직에 있었다면 그야말로 전쟁 직후에 수청당했어야 마땅하지 1961년까지 살아 남아 조선작가동맹 산하에서 문학활동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백석의 북한 거주가 어느 정도 선택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가 적어도 1961년까지는 공산당 산하 조선작가동맹에 문인으로 소속되어 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 월간 《조선문학》지에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는 점을 보아서도 얼마간 짐작된다. 백석이 《조선문학》지에 발표한 글로는 아동문학평론, 창작시, 수필, 번역시가 있다. 물론 백석이 북한에서 그간 발표한 작품으로 이것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김자야의 책 『내 사랑 백석』의 뒷부분에 밝혀놓은 목록을 일부 자료로 해서 《조선문학》지를 통하여 찾아본 것만을 놓고 본다면 백석은 북한에서 아동문학에 상당히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조선작가 동맹의 아동문학분과에 소속돼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조선문학》지에 실린 백석의 아동문학 관련 평론으로 밝혀진 것만 하더라도 3편이나 된다. 그러나 이 숫자만을 놓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조선문학》지에 아동문학작품과 관련된 평론을 쓴 사람으로는 백석 이외에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으며 백석이 같은 기간에 발표한 시작품이 네 차례에 걸쳐 12편임을 고려해볼 때, 그가 북한에서 아동문학 작품에 보여준 관심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석이 북한에서 《조선문학》지에 발표한 아동문학작품 관련의 평론 세 편은 《조선문학》 1956년 5월호에 실린 「동화 문학의 발전을 위하여」와《조선문학》1956년 9월호에 실린 「나의 항의, 나의 제의 : 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 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 그리고 《조선문학》1957년 6월호에 실린 「큰 문제, 작은 고찰」이다. 여기서 백석은 일관되게 아동문학은 교양과 선전의 무기로서 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이외에도 백석은 창작시를 《조선문학》지에 발표하고 있는데 그 창작방법이나 정신은 당의 방침에 충실한 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석이 북한에서 발표한 시는 분단 이전에 그가 발표한 시와 그 성격이 무척이나 다르다. 이런 사정은 그가 번역한 시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백석은 소련 시인 이.뜨왈도브스끼의 작품 「레인과 난로공」을 번역하여 《조선문학》1956년 4워호에 발표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레닌이 난로공을 찾아와 보살피고 위로할 만큼 따뜻하고 위대한 지도자임을 찬미하고 있는 내용의 글이다. 그리고 그는 수필에서도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바탕위에서 소위 사회주의적 도덕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확인된 작품만을 놓고 본다면 백석은 적어도 북한에서 그의 나이 50이 되던 1961년 까지 조선작가동맹에 소속되어 창작을 하고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때는 그동안 출세가도를 달린 한설야와 그 계열의 문인들이 숙청당하기 직전이다. 그러니까 백석은 해방 후 약 15년 동안은 북한에 살면서 그 체제에 동조하는 글을 쓴 셈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석은 1961년 까지 북한 사회의 충실한 작가로서 글을 쓰다가 한설야 계열이 숙청당할 때 함께 숙청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이후에도 계속 북한체제와 이념을 따르거나 주창하면서 다른 지면을 통하여 글을 썼는지 확실하게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 백석의 이름이 이기영이나 박세영, 백인준이나 홍명희 등의 경우와 같이 전면으로 부각된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걸 보면 북한 문단에서 그는 성공적으로 끝까지 활동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1912년 생인 백석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는 우리 나이로 85세이다. (95년 작고로 밝혀짐)1913년 생인 김동리가 비교적 장수를 한 후 작년에 작고했으며, 1915년생으로 평안북도 출신이고 한때 백석이 다녔던 정주의 오산학교를 다니기도 했던 황순원이 월남하여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것을 본다면 백석이 살아있을 가능성도 희박하나마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추측이다. 그리고 그가 1961년까지는 작가동맹에 소속되어 작품을 발표하였다는 것만 사실일 뿐 그에 대한 다른 뒷소식은 거의 전해지는 바가 없다.
             

     -以上   ―  백석의 삶과 문학   '백석이 살아온 길' (정효구)에서 후반부 옮겨옴.